아마존의 차, 슬레이트(SLATE)
자동차의 '선택권'을 고객에게 되돌려주다
2025년 8월, 자동차 시장의 승자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화려한 플레이어가 아닙니다. 르노의 '다치아'는 '본질'에 집중하는 전략으로 고물가 시대의 가장 현명한 선택지로 떠올랐습니다. 그들은 '좋은 차는 비싸다'는 공식을 깨뜨리며 시장을 장악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장에, 아마존의 DNA를 품은 '슬레이트 오토'가 등장했습니다. 2026년 말 첫 고객 인도를 앞둔 이 스타트업은 다치아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지만, 전혀 다른 미래를 그리고 있습니다. 다치아가 지난 시대의 문제를 해결한 완벽한 답안지라면, 슬레이트는 새로운 시대의 질문을 던지는 혁신가입니다.
같은 해답, 다른 문제풀이
두 회사의 출발점은 같습니다. 바로 '전략적 다운셀링'. 자동차의 본질을 제외한 모든 과잉 기능을 덜어내고, 가격의 문턱을 파괴하는 전략입니다.
다치아는 이 해답을 통해 '어떻게 하면 좋은 차를 싸게 살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답했습니다. 그들은 르노 그룹의 검증된 기술을 바탕으로, 신뢰할 수 있는 '가성비 완성품'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것이 다치아의 방식이자, 현재 시장이 열광하는 이유입니다.
슬레이트 역시 같은 해답을 공유합니다. 터치스크린과 파워 윈도우까지 덜어내며 '덜어냄'의 미학을 극단까지 밀어붙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다른 문제를 풀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자동차가 시대에 뒤처지지 않고 고객과 함께 성장할 수 있는가?'
결정적 차이: '거래'와 '관계'의 시작
두 회사의 결정적인 차이는 '덜어냄' 이후에 무엇을 하느냐에 있습니다.
다치아의 비즈니스는 '최적화된 완성품'을 판매하는 순간, 즉 '거래'가 완료되는 시점에 정점을 찍습니다. 고객은 구매 시점에서 최고의 가치를 얻지만, 그 관계는 시간이 흐르며 희미해집니다.
반면 슬레이트의 비즈니스는 '진화하는 플랫폼'을 판매하며 고객과의 '관계'를 시작합니다. '빈 캔버스(Blank Slate)'라는 이름처럼, 고객은 DIY 키트와 수백 가지 모듈로 자신만의 차를 완성해 나갑니다. 이것이 바로 슬레이트가 고객과 관계를 맺는 방식입니다. '선택권'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것, 그것이 슬레이트가 정의하는 고객 관계의 본질입니다.
고객이 새로운 모듈을 고민하고, 자신의 차를 업그레이드하는 모든 선택의 순간이 바로 슬레이트와 고객의 관계가 깊어지는 순간입니다.
왜 '아마존의 카'는 다치아와 다른가
바로 이 지점에서 슬레이트가 '아마존의 카'로 불릴 수 있는 이유가 명확해집니다. 아마존의 성공 비결은 단순히 물건을 싸게 파는 것이 아니라, 고객을 묶어두고 함께 성장하는 강력한 '생태계'를 구축한 데 있습니다.
다치아의 모델은 훌륭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물건을 한 번 파는 '거래'에 가깝습니다.
슬레이트의 모델은 아마존처럼 '관계'에 기반합니다. 그리고 그 관계의 핵심은 끝없는 '선택권'의 제공에 있습니다. 저렴한 기본 플랫폼으로 최대한 많은 고객을 생태계 안으로 끌어들인 뒤, 지속적인 '선택'의 기회를 제공하며 장기적인 관계와 가치를 창출합니다.
기술의 발전 속도가 하드웨어의 수명을 압도하는 전기차 시대에, 이러한 '플랫폼' 방식은 절대적인 강점을 가집니다. 배터리나 AI 시스템 같은 핵심 기술을 모듈처럼 교체하며 항상 최신 상태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완성품'의 숙명인 '기술적 노후화'로부터 자유로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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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레이트 오토는 '자동차계의 이케아'를 표방하는 미국의 혁신적인 전기차 스타트업입니다.
브랜드 의미: '빈 캔버스(Blank Slate)'라는 뜻으로, 고객이 직접 완성하는 자동차라는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 '테슬라(Tesla)'의 아나그램으로, 첨단 기술 완성품의 안티테제(Antithese)임을 암시합니다.
설립 및 투자: 2022년 설립되었으며, 아마존의 전 컨슈머 부문 CEO인 제프 윌키가 공동 창업자로 참여했습니다.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조스를 비롯한 유명 투자자들로부터 약 7억 달러의 자금을 유치했습니다.
대표 차량: '슬레이트 트럭'. 기본 2인승 픽업트럭이며, DIY 키트를 통해 5인승 SUV로 변환 가능합니다.
출시 및 가격: 2026년 말부터 생산 및 고객 인도를 시작할 예정입니다. 가격은 약 2만 7천 달러 이하로, 연방 세액공제 적용 시 2만 달러 이하를 목표로 합니다.
핵심 특징: 핸드 크랭크 창문 등 극도의 단순함을 추구하며, 도색 대신 '랩(Wrap)'으로 커스터마이징하는 모듈식 차체 패널, 수백 가지의 DIY 액세서리, 사용자를 위한 교육 플랫폼 '슬레이트 유니버시티'(예정) 등을 특징으로 합니다.
[묘듈러 플랫폼]
1. 빈 캔버스'와 '레고 브릭'
슬레이트의 모듈러 플랫폼은 자동차를 '완성품'이 아닌, 사용자가 직접 완성해나가는 '코어 플랫폼(Core Platform)'과 필요에 따라 추가하는 '애드온 모듈(Add-on Module)'로 구성됩니다.
코어 플랫폼: 레고의 '베이스 플레이트'처럼, 모든 모듈이 결합될 수 있는 기본 차체를 의미합니다. 최소한의 기능만을 담아 가격을 극단적으로 낮춘 '빈 캔버스' 역할을 합니다.
애드온 모듈: 스피커, 시트, 루프랙 등 기능, 디자인, 형태를 결정하는 모든 부품을 의미합니다. 고객이 필요와 예산에 맞춰 자유롭게 골라 담는 '레고 브릭'과 같습니다.
2. '스케이트보드'와 '모듈식 부품'
이러한 개념은 구체적인 기술 설계를 통해 구현됩니다.
스케이트보드 플랫폼 (Skateboard Platform): 배터리, 모터, 구동계, 조향장치 등 차량의 핵심 동력 시스템을 모두 차체 하단의 평평한 '스케이트보드' 모양 플랫폼에 통합했습니다. 이 견고한 하부 구조는 오랜 기간 사용 가능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분리 가능한 상부 구조체 (Top Hat & Modules): 스케이트보드 플랫폼 위에는 2인승 픽업, 5인승 SUV 등 다양한 형태의 상부 차체('Top Hat')를 올릴 수 있습니다. 또한 차량 외장 패널, 배터리 팩, 인포테인먼트 유닛 등 주요 부품들이 쉽게 탈부착 및 교체·업그레이드가 가능한 '모듈' 형태로 설계되었습니다.
SNACK's NOTE
다치아는 '어떻게 하면 자동차를 더 저렴하게 만들까?'라는 질문에 대한 지난 시대의 가장 훌륭한 답변입니다. 그들의 성공은 진짜입니다.
하지만 슬레이트는 '어떻게 하면 자동차가 고객과 함께 성장하며, 그 가치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라는 미래의 질문에 답하고 있습니다.
'아마존의 카'라는 별칭은 단순히 제프 베조스가 투자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고객에게 '선택권'이라는 이름의 주도권을 넘겨주고, 그 선택의 과정을 통해 장기적인 '관계'와 '생태계'를 만들어나가는 것. 그것이 아마존의 방식이자, 슬레이트가 자동차 산업에 던지는 진정한 혁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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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적 다운셀링은 '무엇이 절대로 빼면 안 되는 본질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핵심 가치의 재정의 (Define the Core): 자동차의 본질은 '안전하고 믿을 수 있는 이동'입니다. 슬레이트 오토는 프레임, 배터리, 모터 등 이 핵심 가치와 직결된 부분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과잉 기능'의 식별 (Identify the 'Over-features'): 핵심 가치 외에, 특정 고객층에게는 가격만 높일 뿐 큰 가치를 주지 못하는 기능들을 식별합니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 거치대로 충분한 고객에게 거대한 터치스크린은 '과잉 기능'일 수 있습니다.
과감한 제거 및 가치 환원 (Remove & Return): 식별된 과잉 기능(파워 윈도우, 화려한 도색, 복잡한 옵션)을 과감히 제거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확보된 비용 절감 효과를 파격적인 가격 인하, 즉 고객 가치로 되돌려줍니다.
결론적으로, '덜어냄'은 전략적 다운셀링의 실행 방식(How)이지만, 그 본질은 '새로운 가치 제안(New Value Proposition)'에 있습니다. 슬레이트 오토와 다치아의 성공은 무조건 많이 채워 넣는 것만이 정답이 아님을, 오히려 과감하고 현명한 '덜어냄'을 통해 더 큰 시장을 열 수 있음을 증명한 사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