짓는다기보다, 묻는다
제49회 세계건축상에서 한국인 건축가가 세 작품으로 동시 수상하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주인공은 고성호, 부산 기반 건축가입니다.
부산 기장군 칠암항은 젊은이들이 떠나며 빈집만 남았던 어촌마을이었습니다. 지금은 연간 80만 명이 찾는 명소가 됐습니다. 변화의 시작은 2021년 문을 연 '칠암사계'였습니다. 고성호가 설계한 작은 카페가 마을 전체를 바꿨습니다.
이 카페에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습니다. 바닷가에 지었음에도 말입니다. 고성호는 건물을 낮게 짓고 작은 정원들을 배치했습니다. "바다 조망 대신 공간적 미덕을 택했다"는 게 그의 설명입니다.
묻는 건축가
고성호는 정규 건축 교육을 받지 않았습니다. 조경을 전공했지만 졸업 후 독학으로 건축을 익혔습니다.
"건축은 형태가 아니라 태도다." 그는 공간을 계획하기 전에 "이 공간이 왜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해야 하는가"를 묻습니다. "건축은 땅을 앉히는 일"이라는 그의 말에는 특별한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땅을 깎고 파서 건물을 올리는 게 아니라, 땅이 원하는 방식으로 건물을 앉힌다는 뜻입니다.
그에게 건축은 짓는 행위가 아니라 묻는 행위입니다. "누군가가 지나가다 발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다시 보게 만든다면, 그걸로 건축은 충분히 제 역할을 한 것"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이는 '건축의 잠언적 태도(Proverbial Architecture)'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큰 소리치지 않지만 깊은 울림을 주는 건축, 일상 속에서 작은 깨달음을 선사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회동 수원지 앞의 카페 '선유도원'이 대표적입니다. 지형을 건드리지 않고 지어졌습니다. 건물 앞뒤로 넓은 창을 배치해 자연을 안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선유도원
신선이 노닐던 경험치를 높이는 공간 _ 선유도원 카페
시간을 품은 공간
금정산 자락의 '성림목장'에서 그의 철학이 가장 잘 드러납니다. 폐목장을 카페로 바꾼 프로젝트입니다.
기존 건축물을 완전히 철거하지 않았습니다. 일부는 남기고, 일부는 철거하고, 일부는 새로 지었습니다. "장소의 기억과 시간의 층위를 시각화"했다고 합니다. 이런 접근법을 그는 "무위자연의 태도"라고 표현합니다. 억지로 무언가를 만들어내지 않고, 자연과 시간이 만들어놓은 것들을 존중하면서 최소한의 개입만 한다는 의미입니다. 건축학계는 이를 '소극적 개입(Passive Intervention)'이라고 부릅니다. 건축가가 주도하지 않고 장소가 요구하는 바에 응답하는 방식입니다.
성림목장
반세기를 지켜온 우리 터, 목장을 되살린 공간 _ 성림목장 카페
로컬이 세계가 되다
고성호의 세계건축상 수상이 특별한 이유는 '로컬 건축'이 세계적 기준에서 인정받았다는 점입니다(부산입니다… 부산!) . 그동안 한국 건축계는 서구의 모던 건축을 따라가기 바빴습니다. 거대하고 화려한 건물이 기준이었죠.
고성호는 정반대 길을 걸었습니다. 작고 소박하며 지역 맥락을 고민한 건축을 했습니다. 부산이라는 특정 장소에서만 가능한 건축을 추구했습니다. 이를 '맥락형 건축(Contextual Architecture)'이라고 합니다. 장소의 역사, 문화, 자연환경을 건축 설계의 출발점으로 삼는 접근법입니다. 역설적으로 그 '로컬함'이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했습니다. 글로벌 스탠더드를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이처럼 각자의 고유한 맥락에서 출발해 진정성 있는 해답을 찾는 것이 더 가치 있게 평가받고 있습니다.
공동체를 되살리는 건축
고성호는 최근 인터뷰에서 "가족 해체에 대응하는 미래 주거 형태"에 관심을 드러냈습니다. 1인 가구 증가, 고령화, 공동체 해체 등에 건축이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들에는 '공동체 회생'이라는 키워드가 등장합니다. 칠암사계가 어촌마을을 되살렸고, 황령산 자락의 '프리젠트'는 두 동의 건물을 브리지로 연결해 열린 관계성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슬로우 어바니즘(Slow Urbanism)'의 실천입니다. 급속한 도시 개발 대신 지역 공동체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그러나 지속가능하게 변화를 만들어가는 방식입니다. 동시에 '사소함의 존중(Respect for the Minor)'이라는 태도도 엿보입니다. 거대한 마스터플랜보다는 작은 카페 하나, 작은 정원 하나가 가진 힘을 믿는 것입니다.
건축이 사회 문제 해결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습니다. 공간이 사람의 행동과 관계를 바꿀 수 있다는 확신입니다.
프리젠트 _ 복합문화공간
“The present is Present”
두 개의 건물은 지하와 2층 브리지를 통해 연결되고 상호 교류되는 형태로 현재를 잇는 공간 구현
질문에서 시작되는 변화
고성호가 일으키고 있는 것은 묻는 건축의 확산입니다. 화려한 선언이나 거창한 이론 없이 작은 카페 하나, 작은 공간 하나를 통해 질문을 던집니다.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바꾸는 초고층 빌딩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일상을 바꾸는 것은 고성호 같은 건축가들의 작은 공간들입니다.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도시가 복잡해지는 시대입니다. 그럴수록 자연과 공동체, 인간적 스케일을 회복하려는 고성호의 시도가 빛납니다.
그의 건축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어떤 공간에서 살고 싶은가? 어떤 관계를 만들고 싶은가? 부산 바닷가의 작은 카페에서 시작된 질문을 세계가 주목하고 있습니다. 진짜 변화는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고성호 작가
“건축은 짓는 일이 아니라, 묻는 일이다.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가, 무엇을 감싸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