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프론 경제: 달라붙지 않는 시대의 역설

"계란이 미끄러지는 프라이팬처럼, 우리는 위기가 미끄러져 나가는 경제를 살고 있다. 하지만 영원한 테프론은 없다."

프라이팬에서 시작된 완벽한 은유

1938년, 듀폰의 한 연구실에서 실수로 발견된 하얀 가루가 있었습니다. 테프론(Teflon)이라 명명된 이 물질은 세상에서 가장 미끄러운 표면을 만들어냈죠. 1960년대, 주방에 혁명을 일으킨 논스틱 프라이팬 광고에서 계란이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장면은 곧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 '달라붙지 않는다'는 물리적 특성이 점차 사회적 은유로 진화했다는 점입니다.


테프론 돈들의 시대

1980년대 뉴욕. 마피아 보스 존 고티는 세 번의 재판에서 연속 무죄를 받았습니다. 언론은 그를 "테프론 돈(Teflon Don)"이라 불렀죠. 범죄 혐의가 프라이팬의 계란처럼 미끄러져 나간다는 의미였습니다.

2016년, 같은 별명이 도널드 트럼프에게 붙었습니다. 스캔들이 터져도 지지율은 끄떡없었죠. "나는 5번가 한복판에서 누군가를 쏴도 표를 잃지 않을 것"이라는 그의 호언장담은 농담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2025년 7월, 이코노미스트는 세계 경제 자체를 "테프론 경제(Teflon Economy)"라고 명명했습니다.


끄떡없는 세계, 불안한 뉴스

트럼프가 "역사상 가장 멍청한 무역 전쟁"을 시작했을 때, 전문가들은 경제 대재앙을 예고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2차 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전면전이, 중동에서는 끝없는 분쟁이, 중국에서는 부동산 거품 붕괴 위기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 중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세계 경제는 여전히 연 3%씩 성장하고 있습니다. OECD 국가들의 실업률은 5% 이하. 주가는 순간 떨어져도 곧바로 반등합니다. 마치 테프론 프라이팬처럼, 위기가 달라붙지 않고 미끄러져 나가는 것 같습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트럼프의 15% 관세 요구를 받아들이고도 "선방했다"며 안도하는 분위기. 최악이 아니라는 것에 감사하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이 바로 테프론 경제의 단면입니다.


흡수와 지연의 메커니즘

이코노미스트의 분석은 명쾌합니다. 첫째, 기업들의 공급망 관리가 놀라울 정도로 정교해졌습니다. 20년 전보다 95% 늘어난 전문가들이 실시간으로 위기를 관리합니다. 둘째, 정부들이 "나쁜 뉴스가 들리면 돈을 푸는" 전략을 체득했습니다. GDP의 4%가 넘는 재정적자를 감수하며 경제를 떠받칩니다.

하지만 여기서 불편한 진실이 드러납니다. 1910년 미국 대화재(Big Burn) 이후 수립된 '오전 10시 정책'을 기억하시나요? 현재의 테프론 경제도 비슷합니다. 작은 위기도 허용하지 않으면서 문제가 축적되고 있죠. 이집트와 파키스탄처럼 구조조정 없이 연명만 하는 '좀비 경제'가 59개국에 달합니다.

  • 1910년 8월, 아이다호와 몬태나주에 걸쳐 1만 2,000km²를 태운 미국 역사상 최악의 산불 이후, 초대 산림청장 기퍼드 핀초(Gifford Pinchot)가 수립한 정책. "모든 산불은 발견 다음날 오전 10시까지 완전 진화"를 원칙으로 했다. 이 정책은 50년간 유지되다가, 작은 산불도 허용하지 않으면서 축적된 마른 나뭇가지가 오히려 더 큰 화재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이 밝혀져 폐기되었다. (US Forest Service History)


테프론 코팅의 수명

실제 테프론 프라이팬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코팅이 벗겨지고, 결국 음식이 눌어붙기 시작하죠. 트럼프의 관세 효과가 시장에 나타나기까지 6-18개월이 걸린다는 분석도 같은 맥락입니다.

존 고티는 결국 1992년 종신형을 받았습니다. FBI는 "테프론이 사라졌다. 이제 돈은 벨크로로 덮여있고, 모든 혐의가 달라붙었다"고 선언했죠. 트럼프도 여러 기소를 당했고, 테프론 경제 역시 언젠가는 그 한계를 드러낼 것입니다.


달라붙지 않는 시대의 역설

테프론이라는 브랜드가 주방에서 시작해 마피아, 정치, 그리고 경제 시스템 전체를 설명하는 은유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는 '달라붙지 않는 것'을 선호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책임도, 결과도, 심지어 위기조차도.

하지만 물리학의 기본 법칙을 기억해야 합니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고, 빚은 언젠가 갚아야 합니다. 테프론 코팅이 벗겨진 프라이팬에 음식이 눌어붙듯, 지연된 위기는 더 큰 충격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고요함은 폭풍 전야일지도 모릅니다. 뉴스가 떠들썩해도 시장이 조용한 이 기묘한 시대, 우리는 테프론 경제의 매끄러운 표면 아래 무엇이 쌓이고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결국 중요한 건, 아무리 좋은 테프론 팬도 언젠가는 교체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언제, 그리고 어떻게 안전하게 교체할 것인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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